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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걸이 말하는 작가 박찬걸
아버지의 방문을 열며
내가 태어난 해는 무척이나 불온했다. 유신헌법이 온 나라에 드리웠을 때니 말이다. 세상은 치열하게 대립했고, 도시의 좁은 골목엔 푸세식을 제치고 ‘똥차’가 누비며 신기술을 자랑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정부가 만들어낸 교과서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리라. 돌아가는 세상에 불안을 느끼며 다섯째 막내로 태어난 나를 맞이했으리라. 나의 유년 시절은 늘 가난했다. 아버지가 들고 오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캐논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부유함을 상상했다. 아련했던 그 시절, 우리집에는 라디오와 카메라처럼 대접받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순신 테라코타였다. 교육청 공모에서 당선된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을 통틀어 최초의 작품 감상이 아니었을까. 테라코다에 바른 금칠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며 동상을 찬찬히 뜯어보던 기억, 물성. 그 기억의 줄기를 따라 나는 조각가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끝이 나의 손끝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경험. 나무도 깍고 흙도 주무르며 뭔가를 계속 만들었던 아버지는 하꼬방 같은 안방의 절반을 조잡한 작품들로 채웠다. 안방에서 나던 니스 냄새와 나무 냄새가 기억으로 환원된다. 뭔가를 만들던 구부러진 아버지 등의 형상. 나는 이따금 작품을 만들며 여전히 아버지의 안방을 채워나가고 싶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는 힘겹고 묵묵하게 나를 지원하셨고, 대학 합격 이후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기로 한 나는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동시에 시작했다. 쉽지 않은 출발이었지만 그것은 나를 믿어 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맨발로 뛰며 운영했던 입시학원은 그야말로 현장이었다. 교육현실의 부조리를 살갗으로 만났고 그로인해 가르치는 것에 대한 내 안의 열정을 밖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쉬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방향을 고민했으며 그것은 결국 나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 등록도 그러한 시각을 확장해나가고 싶어서였다. 내게 있어 작업은 삶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타인과 나를, 세상의 삶을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테라코타를 만지며 어린 내가 느꼈을 체험, 그것은 결국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쉬지 않고 걷고 주저앉고 달렸다. 작가로서 작품을 쏟아내듯 완성했고 버렸으며 질문했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와 초빙교수로 성숙한 지성들을 가르치는 귀한 기회를 오랫동안 가져왔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마치 무언가 결실을 내듯 나의 40년이 차오르고 있다. 해외 유수의 갤러리에서 작가 박찬걸을 찾고 있으며 국내의 국공립 사립 미술관에서도 전시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국내외 기업의 콜라보레이션 요청 또한 나의 창작 욕구를 끓게 하고 사유를 깨운다. 대학 시절, 생각만으로도 내 안의 불꽃을 터뜨리던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무 냄새나던 아버지의 방 앞을 서성인다. 그 방은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결핍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게 성찰의 방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창작 작업도 교육도 내게는 크고 깊은 숲이다. 그 숲으로 가기 위해 아버지의 방문을 연다.
스승이 된다는 것
어림잡아 내 인생의 절반을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왔다. 입시학원 시간 강사에서부터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는 지금까지 말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나는 가르침을 받아왔고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여전히 나의 작업과 인생과 교육의 길에서 따라가야 할 스승이 계시다. 작품제작으로 피로가 쌓일 때마다 다시 작품 제작에 몰두하던 무섭도록 진지했던 스승님은 이십 년 전에도 그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일도 그러하시리라. 스승님의 모습은 이론이나 사변의 틀로 정리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삶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청년기를 보냈고 중년에 들어섰다. 그것이 가장 크나큰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삶을 관통하는 작품에 대한 그 성실함과 뜨거움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오랜 시간 배우고 동시에 가르치며 고민하고 질문했던 몇 가지와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부분들을 정리해본다. 우선은, 사회 전반에 안전에 대한 인식이 안타까운 사고들 이후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위험한 공구를 다룰 수밖에 없는 조소과 특성상 적극적으로 안전 지침을 세울 필요가 있다. 케이스 별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과 인식 교육이 절실하다. 모든 교육 현장의 문제이기도 한데, 교사 일인당 학생 수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학생들의 자율성을 제한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자는 최대한 학생들의 표현 방식을 열어두는 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제한된 틀 속에서 안주하지 말고 그들의 표현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장해주어야 한다. 반보편적 사고를 자유롭게 열어주되 뿌리 없이 부유하는 반사회적 사고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도 교육자의 몫이다. 또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모두 끌어안도록 해야 한다. 저마다 작품에 대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반드시 함께 고민한다.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함께 하고 낯섦과 두려움에 대해 당당해질 수 있도록 섬세하게 접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인 방향 제시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교육에 의해 줄 세워졌고 끄트머리 어디쯤에 내 자리가 있었다. 초라하다고 여겼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함만이 안개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그 기억은 철을 자르고 이어붙이며 작업할 때 나를 들여다보는 우물의 밑바닥이 되곤 한다. 나의 이러한 경험들을 학생들과 나누고자 한다.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전망하며. 다만,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학생들은 결코 평면적으로 줄서있지 않고 각각의 입체적 개성을 띈 귀한 보물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곧 나의 스승이 되기도 할 것이며 창작의 영토에서 함께 번민하는 동지가 될 것이다. |
엄마, 정애
엄마는 일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다. 허리도 다리도 모두 성치 않고 주름은 유별나게 깊어 어느 날부터 나는 엄마를 보며 불쑥불쑥 할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마는... 봄이 되면 매실나무를 세차게 흔들어 남김없이 털어내고 마당에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이 잡듯 잡초를 싹 뽑는다. 된장이며 고추장이며 때마다 담가 장독을 채우고 가을에는 뒷산 도토리를 모조리 훑어 배낭에 그득 지고 온다. 그리고 엄마는... 그림을 그린다. 시골집을 무던히 지키던 잡종 개 진이, 담벼락 아래 쪼르르 피는 수선화 무더기, 꽃매미 때문에 몸살을 앓던 병든 포도나무, 아버지를 묻고 그 위에 심어둔 배롱나무... 엄마는 그리며 어루만지고 새끼들처럼 그것들을 키워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누가 저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곳엔 철새들이 날아오고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정애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내 엄마... 붓으로 품어 키워낸 그림들 앞에서 우리는 눈물겹고 또 눈물겹다.
-막내딸 박미라 (동화작가)-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날 아침,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때마침 겨울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털고 푸드덕 날아갔습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이 떠난 지 석 달이 지났어요. 오늘은 겨우 일어나 시내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당신이 봤다면 뭐라셨을까. 거울을 보고 제 모습이 얼마나 낯설던지 그만 눈물이 쏟아지지 뭐예요. 다시 머리를 길러야겠어요. 시간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여보.
봄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네 정원 여기저기에서 납작한 새순들이 돋아났습니다. 할머니는 정원을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잔디밭 풀도 매고, 포도나무와 매실 나무 가지도 잘라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끝이 없었습니다.
오월이 되자 매실이 손톱만 하게 영글고 패랭이가 개집 주변에 짜르르 피어났습니다. 어느 날, 시내에 살고 있는 손녀딸들이 트럭에 낡은 피아노를 싣고 찾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오늘 우리 손녀딸들이 어릴 때 치던 피아노를 가져왔어요. “할머니, 적적할 때 치세요.” 하더라고요. 겨우 겨우 기억을 더듬어 가며 피아노를 쳐보았어요. 엉터리지만 당신 좋아하던 노래 몇 곡 쳐보고요, 예전에 당신이랑 부르던 노래도 오랜만에 흥얼거렸어요. 손은 전 같지 않은데, 당신과의 기억은 생생하기만 해요.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아 옆 개울엔 물이 말랐습니다. 어린 가재들은 부지런히 돌덩이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할머니가 시름에 잠겼습니다. “내가 세상 뜨고 나면 정원 나무 아래 묻어주시구려.” 할아버지의 유언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여보, 정말 미안해요. 오늘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아끼던 자귀나무를 베어냈어요. 자귀나무가 당신이 묻힌 배롱 나무의 빛을 가로막아서요. 그래서 그런지 잎도 시원치 않게 달리고 가지도 약해 보여요. 이다음에 저 가고 나면 묻어달라고 심어둔 배롱나무만 잎이 무성하니 당신께 미안한 마음 가눌 수가 없어요. 제 나무보다 당신 나무에 백일홍이 더 탐스럽게 피어야 할 텐데요.
여름 내 정원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심었던 수많은 꽃들이 피고 졌습니다. 능소화가 줄기를 타고 오르고, 봉숭아, 금잔화가 여름 정원을 빛내주었습니다. 마침내, 배롱나무가 진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묻힌 배롱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결엔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할머니는 꽃이 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예쁜 것들이 다 달아나는구나.’
사랑하는 당신께
가을인가 봅니다, 여보. 여름 꽃들이 하나 둘씩 지고, 가을꽃들이 피기 시작하네요. 뿌리 하나 다칠세라 애지중지 심고 가꾸던 당신... 이제는 제가 혼자서 모두 손질한답니다. 오늘 낮에는 문득, 지는 꽃잎들이 아깝지 뭐예요. 그저 되는대로 앞치마에 주워 담느라 해지는 줄도 몰랐어요. 꽃잎들을 종류별로, 색깔별로 나누어 말려두려고요. 당신이 떠나고 나니 꽃잎 하나도 버리지 못할 정도로 소중하기만해요. 마음이 약해진 걸까요.
할머니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작은 유리병 다섯 개를 샀습니다.
한밤 중, 할머니는 유리병 하나하나에 자식들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할머니네 외딴 집에는 소리 없이 첫눈이 내렸습니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 할머니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집안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머리도 곱게 묶었습니다. 음식 준비를 하며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저녁 무렵, 멀리서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내일이면 당신이 가신지 꼭 일 년이 되네요. 아이들이 모두 왔어요. 우리는 모여서 당신 얘기를 했답니다. 당신 기억해요? 당신 떠나실 무렵 제가 울면서 “여보, 나도 당신 따라갈래요.” 했더니, 당신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지요. “나 따라오다 말고 가스 불에 밥 올려놨다고 도로 뛰어갈 사람이...“ 마지막까지 제게 웃음을 주던 당신이 오늘은 더 그립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유난히 겨울을 좋아하던 당신. 제가 당신께 고백한 적 있던가요? 45년 전, 키는 큰데다 꼭 맞는 바지를 입은 당신을 보고 처음에는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실은요, 그런 당신을 몰래 훔쳐보면서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답니다. 여보, 계절이 지나가는 것처럼 저도 더 늙어가겠지요. 하루하루 기운도 떨어질 테죠.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괜찮아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정원이 있고, 당신과의 추억이 있어요. 저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지요? 저 나무들처럼 말이에요.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배롱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떨며 겨울을 조금씩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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